일곱가지 문화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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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선생의 어깨의 7개의 사마귀가 북두칠성과 같다.
북두칠성이 내려온 것 같은 영천문화의 체험

포은 정몽주 선생의 발자취 일곱가지의 문화여행
  1. 포은 정몽주 유허비 :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과 절개

    포은 선생의 유훈은 효행과 충절이다. 선생의 학문이 배움에서 그치지 않고 행함으로 나아간 것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유학의 학문적 가치에 대한 완성이기도 한다.
    포은 선생은 19세 (1355, 공민왕 4년) 정월에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10년 뒤 29세(1365년) 정월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이 때 포은선생은 부모의 묘소에서 여막을 지어놓고 삼년동안 효성을 다하였다. 선생의 삼년상의 실천은 '부모의 상을 만나더라도 다만 백일로 치르는 것이 통례'였던 고려의 풍습에서는 지극한 효성이 아니고서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듯 선생은 아름다운 자질을 드러내어 우리나라에서 삼년상이라는 상례의 표준을 세운 분이시다. 이에 조정에서 그 뜻을 기려 ‘효자리(孝子里)’라는 비를 내리셨다.
    선생께서 남기신 가르침 중 또 하나는 충절이다. 1392년(고려 공양왕 4년), 이방원(조선태종)은 술상을 차려놓고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랴’며 <하여가(河如歌)>로 회유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며 <단심가(丹心歌)>로 화답하면서 절개를 꺾지 않으셨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어짐을 기리는 성인비를 송도의 선비들이 선죽교에 세웠다고 하는데, 그 비문에 "포은 정선생 성인비 일대충의 만고강상"이라도 쓰여 있다고 한다.

  2. 생가지 : 포은 선생의 탄생

    포은 선생은 아버지 운관과 어머니 영천 이씨와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선생을 임신하고서 맑디 맑은 난꿈(夢蘭)을 꾸셨는데, 낳아서 보니 선생의 어깨에 검은 점 7개가 펼쳐져 있었다.
    북두칠성은 '하늘의 기틀이 되니, 북두칠성이 한번 운행하면 사계절이 맞추어 오고, 오행이 차례대로 돌고, 추위와 더위가 알맞게 되며, 음양이 자유로워진다' 고 하였으니, 포은선생께서 어깨에 북두칠성을 지니고 오신 것은 나라의 운명(運命)과, 사람들의 인륜(人倫)과, 하늘의 바름(天彛)을 붙들어 세우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의 모습이 이러하시니, 동시대의 인물인 목은 이색(李?)은 "해동에 의인(義人)이 났다"고 하였고, 석탄 이존오(李存吾)도 "나는 비로소 학(學)과 행(行)의 스승을 만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숙종대왕도 선생의 초상을 보면서, "순연하고 조화로운 기운은 비온 뒤의 달처럼 맑고 깨끗하고, 의관은 고고하며, 참다운 풍채는 참으로 빼어나다"하고 기리며 노래 하였다.

  3. 부래산 : 포은 경세제민의 정신

    부래산은 옛 임고서원이 있던 터이다. 이곳에서 자라던 은행나무도 서원을 따라 옮겨가서 오백년을 묵묵히 서원을 지키고 있다. 이처럼 이곳은 포은선생의 가르침을 처음으로 이어받아 행하던 곳이기도 하다. 선생은 평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깊이 공부하시고, 이를 자주 암송하였다 한다. "상벌은 나라의 큰 구법이니 한 사람을 상 줌으로써 천만 사람을 권면하게 하는 것이요, 한 사람을 벌함으로써 천만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이니,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밝지 않으면 중용(中庸)을 얻어서 사람들을 복종하게 할 수 없다 "고 하여 중용의 도리를 강조하셨다. 선생은 삶의 보편성에 따른 경세의식을 지닌 분으로 백성의 생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셨다. 또한 선생은 "고려 오백년의 강상(綱常)의 무거움을 스스로 맡으셨고, 뒤로는 조선의 억만년 절의(節義)의 가르침을 열어 놓으셨으니, 과연 선생의 공은 위대하기만 하다"고 포은선생집의 ‘발문(跋文)’에서 적고 있다.

  4. 임고서원 : 동방이학의 조종 포은선생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본받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인의 집에 사당을 세우고,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서울에 5부 학당(學堂)을 세우고,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지방마다 향교(鄕校)를 설치하여 나라의 풍속을 예(禮)스럽게 바꾸고, 성리(性理)의 법을 지켜 조선의 성대한 문명(文明)을 열었다. 이에 조선에 성리학(性理學)이 일어나게 되고, 정암 조광조나 퇴계 이황·율곡 이이·우계 성혼과 같은 인물이 학문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은 조선의 건국을 부정하고 고려를 위해 충성을 다한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선생의 그 끝없는 은혜를 기리며, 선생을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租宗)으로 존숭하였다. 선생은 중종 12(1517)에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소로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선생의 학문을 숭상하고 인품을 숭앙하여 13곳의 서원에서 선생을 제향하고 있다.

  5. 전망대 : 호연지기

    충성과 효행으로 모범이 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근본으로 삼으신 분으로 ‘호연한 기운’을 천지의 바른 기운으로 여기고, 이 기운을 잘 기르고 보조하면 도리(道理)와 의리(義理)를 지니게 되는, 이것이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하였다. 또 선생은 <호수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며>라는 시에서 "깊은 못에 잠겨있되 힘차기도 한 것을", "사물의 이치는 들쑥날쑥 본디 같지 않네"라고 하였고, <서쪽 이웃에 사는 이부령을 맞아 달을 구경하며>라는 시에서는 "그림자 마주하며 밝은 달을 맞으니 맑은 마음이 하늘로 향하는 거 같구나, 빛은 맑아서 거두어 들일만하며 내 마음의 근심 걱정 모두 씻어버리고 남기지 않게 한다."고 하여, 자연 속에서 우리네 삶의 바른 이치를 깨달으려고 하였다.

  6. 도일지 : 포은의 시문학

    포은 선생은 버드나무를 노래하는 시를 많이 썼다. 특히 버들잎은 그 흔들림이 만경창파에 흔들리는 물결로 상징화 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명나라 일본 등 고향을 떠나 있었던 적이 많은 포은에게서 버드나무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던 나무였다. 그리고 , 선생의 시에 여러 번 등장하는 매화나 소나무 , 대나무, 난초 등은 모두 군자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포은의 절개와 올곧음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소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곧음을 삶의 가치로 생각했던 선생을 두고 조선의 문인들은 "선생은 경술(經術)로 시작하여 문장(文章)이 문한(文翰)의 무리 중에서도 뛰어나고 빛나서 그 위에 나설 사람이 없었다"라고 선생을 평하였고, 선생의 시에 대해서는 허균이 "풍류가 호탕하고 천고에 빛난다"거나, "펄펄나는 기상과 호쾌한 행동이 그 인품과 닮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문인인 자하 신위는 <동인논시(東人論詩)>에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리학을 전(傳)하였고, 절의(節義)는 당당히 백세에 전해질 것이며, 시와 문도 겸하여 뛰어난 줄 몰랐더니 ‘판잣집에 빗소리와 봄 이른 매화’ 구절을 보면 뛰어나고 높기만 하구나"라고 선생의 시문을 칭송하고 있다.

  7. 부모묘소 : 포은선생 효행, 삼년상

    포은 선생은 19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29살에 어머니를 여의였다. 선생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3년 동안 부모님의 여막을 지켰다. 선생이 행한 삼년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행한 것으로 이후 상례의 기준이 되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 가지 않은 길을 열어 가신 선생의 모습은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 청강에 고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하시며 선생을 항상 바른 길로 인도하셨던 어머니 영천이씨의 가르침이 낳은 것이라 하리라. 공자는 그의 제자 자아와의 대화에서 "자식은 태어난 지 삼년 된 뒤라야 부모의 품을 벗어난다."하여 삼년상이 부모님에게서 받은 의례임을 말하고 있다. 포은 선생이 어머니의 ‘시묘살이’기간 동안 친구인 ‘이집을 기다리며’ 쓴 시에, 비 내린 우항리의 동산과 주변의 경관, 그리고 포은선생의 상념을 만날 수 있다.

문닫고 고즈넉이 앉아 잠드니 가랑비는 내려 동산 숲을 적셨네.
청춘의 꿈이라도 꾸려 했더니 황조의 소리가 갑자기 들리네.
무꽃은 열매를 맺고 복사꽃 오얏잎은 그늘지는데,
마침 서쪽 이웃이 찾아와 시 짓는 나에게 친구가 되어 주네.